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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할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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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터 할슈타인은 독일의 법학자, 외교관, 정치인으로, 유럽 통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1901년 마인츠에서 태어나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교수로 재직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군 포로로 수용소에서 법학을 전공하기도 했다.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서독의 주권 회복과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 설립에 기여했으며, 1955년에는 동독을 승인한 국가와 국교를 단절하는 할슈타인 독트린을 발표했다. 또한, 유럽 경제 공동체(EEC)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유럽 통합을 주도했으나,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사임했다. 그는 뛰어난 지성과 언변으로 평가받았으며, 유럽 통합에 대한 그의 기여는 현재 유럽 연합(EU)의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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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할슈타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7년의 발터 할슈타인
직책
직책유럽 위원회 위원장
임기 시작1958년 1월 7일
임기 종료1967년 6월 30일
전임(직책 신설)
후임장 레이
국무장관연방 외무부
임기 시작1951년 4월 2일
임기 종료1958년 1월 7일
전임(직책 신설)
후임힐거 반 셰르펜베르크
연방하원 의원노이비트
임기 시작1969년 9월 28일
임기 종료1972년 11월 19일
개인 정보
출생명페터 할슈타인
출생일1901년 11월 17일
출생지마인츠, 독일 제국
사망일1982년 3월 29일
사망지슈투트가르트, 서독
안장지발트프리드호프 묘지, 슈투트가르트, 독일
정당독일 기독교민주연합
모교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
군 복무
소속베르마흐트
복무 기간1942년 ~ 1945년
계급상급중위
참전제2차 세계 대전
전투프랑스 점령
노르망디 상륙 작전
셰르부르 전투

2. 생애

1901년 11월 17일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본 대학교, 뮌헨 대학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25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구원 생활을 거쳐 1930년 로스토크 대학교, 1941년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법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과 관련된 여러 교수 단체 회원이기도 했으나, 나치즘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어 나치당에 직접 가입하지는 않았다. 1938년에는 로마에서 열린 이탈리아와의 교섭 회합에 독일 대표로 참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 독일 국방군 예비역 중위로 프랑스 북부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1944년 6월 26일 셰르부르 전투에서 미국 육군에 포로로 잡혔다. 미국 미시시피주의 포로 수용소에 머무는 동안 동료 포로들을 대상으로 법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1945년 11월 독일로 귀환하여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1948년에는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객원 교수로 활동했으며, 1949년부터 1950년까지 독일 유네스코 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1951년부터 1958년까지 서독 외무부 차관으로 재직하며 서독의 외교 정책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1955년에는 동독을 국가로 승인한 나라와는 외교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독트린' 발표를 주도했다. 또한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 창설 협상에 서독 수석대표로 참여하는 등 초기 유럽 통합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1958년 1월 7일부터 1967년 6월 20일까지 유럽 경제 공동체(EEC)의 초대 집행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유럽 통합 심화에 힘썼다.

1969년 9월 28일부터 1972년 11월 19일까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 소속으로 독일 연방의회 의원을 지냈다. 의원직 퇴임 후에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저술 및 강연 활동에 집중했다.

1982년 3월 29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사망했으며, 슈투트가르트 발트프리트호프 묘지에 안장되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2. 1. 학자로서의 삶

1901년 11월 17일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다름슈타트의 초등학교를 거쳐 마인츠의 김나지움을 1920년에 졸업했다. 이후 본 대학교,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 훔볼트 대학교 베를린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국제 사법을 전공하여 1925년 베르사유 조약의 상업적 측면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 법률 사무원으로 일했고, 1927년 자격 시험 합격 후 잠시 판사로 활동했다. 이후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외국 사법 및 국제 사법 연구소에서 비교 상업 및 회사법 연구원으로 1930년까지 근무했다. 1929년에는 회사법에 대한 논문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하빌리타치온(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1930년, 29세의 나이로 로스토크 대학교사법회사법 교수로 임명되어 당시 독일 최연소 법학 교수가 되었다. 1941년까지 로스토크 대학교에 재직하며 법학부 학장을 맡기도 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비교법 및 경제법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나치 시대에는 국가 사회주의 법률가 연맹, 국가 사회주의 국민 복지 협회, 국가 사회주의 독일인 교사 연맹 등 여러 직능 단체에 가입했지만[2], 나치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당원이 되지는 않았다. 1938년에는 로마에서 열린 이탈리아와의 교섭 회합에 독일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3].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부터 독일 국방군 예비역 중위프랑스 북부 제709보병사단에 배속되어 복무했다. 그러나 1944년 6월 26일 셰르부르 전투 중 미국 육군에 포로로 잡혔다. 이후 미국 미시시피주의 독일군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곳에 '수용소 대학'을 만들어 동료 포로들에게 법학을 가르쳤다.

1945년 11월 독일로 귀환한 할슈타인은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의 재개교에 힘썼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바이에른주 경제성 차관직 제안을 거절하고, 1946년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교수로 복귀하여 같은 해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1948년까지 재임했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는 미국 워싱턴 D.C.조지타운 대학교에서 객원 교수로 국제 관계론을 강의했다. 또한 독일 유네스코 위원회 창설에 참여하여 1949년부터 1950년까지 초대 의장을 맡았다.

2. 2. 외교관 및 정치인으로서의 삶

1950년 8월, 아데나워 총리는 할슈타인을 연방 총리실 사무차관으로 임명하여 슈만 플랜 수용에 관한 협상을 담당하게 했다. 이듬해 아데나워(당시 외무장관 겸임)의 지명으로 서독 외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어 1951년부터 1958년까지 재직했다. 당시 서독은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 유럽 방위 공동체 가입 협상 등 복잡한 외교 현안을 안고 있었고, 실무를 담당한 할슈타인은 이 과정에서 때때로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1955년 9월 22일에는 서독의 중요한 외교 노선인 '할슈타인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는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을 국가 승인한 국가와는 국교를 단절한다는 원칙이었으나, 1955년 서독과 국교를 맺었고 동독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소비에트 연방은 예외로 인정되었다. 이 정책에는 외무성 정책국장 빌헬름 그뢰베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할슈타인은 과거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로마 조약 초안 작성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이 시기 신임 외무장관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외교 정책 결정 과정에서 그의 영향력은 다소 축소되었다. 브렌타노는 할슈타인을 주미 대사로 보내려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58년 1월 7일, 유럽 경제 공동체(EEC)는 로마 조약 체결의 핵심 인물이었던 할슈타인을 초대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1959년에는 EEC 공동 시장 창설과 자유 무역을 목표로 하는 '할슈타인 계획'을 발표하며 유럽 통합에 기여했다. 그러나 유럽 통합 심화를 추구했던 할슈타인의 구상은 프랑스 샤를 드 골 대통령의 입장과 충돌했다. 드 골은 국가 주권을 제약하는 초국가적 결정에 반대하며 프랑스 대표를 EEC 회의에 보내지 않는 '빈 의자 정책'으로 대응했고, 이러한 갈등 속에서 할슈타인은 1967년 6월 20일 위원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69년, 로베르 쉬망 상을 수상하는 할슈타인


EEC 위원장직 사임 후 할슈타인은 서독 정치 무대로 돌아왔다. 1968년 1월에는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민간 기구인 유럽 운동 국제기구 회장으로 선출되어 1974년까지 활동하며 '유럽 합중국'이라는 자신의 비전을 계속 알렸다.

1969년 연방 선거를 앞두고, 당시 라인란트 팔라티네이트 주 총리였던 헬무트 콜 CDU 대표는 할슈타인에게 노이비트 지역구 직접 출마와 주 CDU 정당 명부 선두 자리를 제안했다. 당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총리가 이끌던 CDU 내에서는 할슈타인이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차기 외무장관으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Der Spiegel|슈피겔de지에 따르면, 콜은 하인리히 뤼브케 연방 대통령의 후임으로 할슈타인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선거 결과 CDU가 야당이 되면서 할슈타인은 정부 직책을 맡지는 못했지만, 1969년 9월 28일부터 1972년 11월 19일까지 CDU 소속 독일 연방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외교위원회 소속으로 에리크 블루멘펠트, 카를 루드비히 바그너 등과 함께 유럽 문제에 대한 당의 주요 대변인 중 한 명이었으며, 유럽 의회 의원의 직접 선거 도입을 지지했다. 그러나 지역구와의 개인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고, 이 업무는 주로 조수가 담당했으며, 결국 1972년 선거에서는 재지명되지 못했다.

1972년 연방의회에서 물러나고 1974년 유럽 운동 회장직에서도 물러난 후, 할슈타인은 활발한 정치 활동에서는 은퇴했지만 저술과 강연 활동은 계속했다. 1982년 3월 29일 슈투트가르트에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국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진 후 1982년 4월 2일 슈투트가르트 발트프리트호프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슈투트가르트 발트프리트호프 묘지에 있는 발터 할슈타인의 묘비

3. 할슈타인 독트린

1951년부터 1958년까지 서독 외무부 차관을 역임했다. 당시 서독은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나 유럽 방위 공동체 가입 협상 등 여러 중요한 외교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할슈타인은 1955년 9월 22일,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을 국가 승인한 국가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다는 원칙을 담은 '할슈타인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 방침에는 외무성 정책국장 빌헬름 그뢰베의 주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다만, 같은 해 서독과 국교를 재개했으며 동독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소비에트 연방은 이 원칙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신임 외무장관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와의 갈등으로 인해 외교 정책 결정 과정에서 할슈타인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다.

4. 유럽 통합에 대한 기여

1951년부터 1958년까지 서독 외무부 차관을 역임하며 서독의 주권 회복과 유럽 방위 공동체 (EDC) 창설 협상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EDC 창설은 프랑스 의회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나, 이는 이후 서유럽 연합 (WEU) 창설과 서독의 NATO 가입으로 이어지는 런던 및 파리 회담 (1954)의 토대가 되었다. 할슈타인은 이 회담에서 독일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서독의 주권 회복과 서방 진영 편입에 기여했다.

1958년 1월 7일, 할슈타인은 새로 출범한 유럽 경제 공동체 (EEC)의 초대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1967년 6월 20일까지 재임했다. 그는 할슈타인 위원회를 이끌며 관세 동맹과 4가지 자유의 구현, 공동 농업 정책 (CAP) 등 유럽 통합의 초기 단계를 설계하고 추진했다. 할슈타인은 유럽 통합에 대한 강력한 연방주의적 비전을 가지고 있었으며, EEC 집행위원회를 단순한 행정 기구가 아닌 미래 유럽 정부의 기초로 간주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일종의 유럽 총리"로 묘사하며 국가 주권을 "과거의 교리"로 여기기도 했다.

할슈타인의 연방주의적 접근 방식은 국가 주권을 강조했던 샤를 드 골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여러 차례 충돌을 빚었다. 특히 영국의 EEC 가입 문제, 푸셰 계획 (드골이 제안한 정부 간 협력체 구상), 공동 농업 정책 (CAP)의 재정 및 운영 방식, 집행위원회의 권한 범위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심화되었다.

드골은 할슈타인이 이끄는 집행위원회가 회원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초국가적인 권력을 추구한다고 비판했으며, 특히 할슈타인이 마치 국가 원수처럼 행동한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러한 갈등은 1965년 프랑스가 EEC 각료 이사회 참석을 거부한 '빈 의자 위기'로 절정에 달했다. 이 위기는 1966년 룩셈부르크 타협으로 봉합되었으나, 회원국의 만장일치 의사결정 원칙을 사실상 강화하여 초국가적 통합을 지향했던 할슈타인의 비전에 제동을 걸었다. 결국 드골의 지속적인 반대로 할슈타인은 1967년 임기 연장에 실패하고 위원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샤를 드골의 초상 사진
할슈타인은 EEC 위원장으로서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과 주요 대립을 겪었고, 이는 결국 할슈타인의 퇴임으로 이어졌다.


할슈타인의 유럽 통합 비전은 법치주의에 기반한 연방적 유럽 공동체 건설에 있었다. 그는 미국의 연방제 모델에서 영감을 받았으나, 유럽의 다양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형태의 통합을 추구했다. 그는 경제 통합을 정치적 통합으로 나아가는 점진적 과정으로 보았으며, 특정 분야의 통합이 연쇄적으로 다른 분야의 통합 필요성을 이끌어낼 것이라는 '물질적 논리' (Sachlogik|자흐로기크de)를 제시했다. 슈만 계획을 경제 통합의 첫 단계로 보았고, 이것이 방위, 사회 정책, 외교 정책 등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될 것으로 기대했다.

EEC 위원장 퇴임 후에도 할슈타인은 유럽 통합 운동에 계속 관여하여, 1968년부터 1974년까지 국제 유럽 운동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유럽 연합(EU)의 초석을 다진 핵심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5. 평가 및 유산

발터 할슈타인은 유럽 통합의 중요한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와 유럽 경제 공동체(EEC) 창설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초대 EEC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유럽 공동 시장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전후 유럽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초석을 놓은 것으로 인정받는다.

그는 학문적 성과와 국제적 활동을 통해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여러 대학으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발터 할슈타인 명예 박사 학위 수여 대학
구분대학 (일부)
유럽 (9개)파도바 대학교, 서식스 대학교, 리에주 대학교, 낭시 대학교, 루뱅 가톨릭 대학교, 오비에도 대학교, 튀빙겐 대학교
미국 (9개)조지타운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존스 홉킨스 대학교



또한 유럽 통합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다양한 상을 수상했다.

발터 할슈타인 주요 수상 내역
연도상훈명수여 기관/사유
1953/54독일 연방 공로 훈장 대십자장 (별 및 띠 포함)
1961카롤루스 대제상아헨 시 (유럽 연합 노력 공로)
1969로베르 슈망 상로스토크 대학교
1971브뤼셀 명예 시민브뤼셀 시



이 외에도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오스트리아 공화국 봉사 명예 훈장, 레오폴드 훈장, 네덜란드 사자 훈장 등 다수의 훈장을 받았다.

할슈타인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날카로운 지성과 뛰어난 언어 구사력, 높은 신뢰성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다. 그러나 동시에 차갑고 접근하기 어려우며 지나치게 지적인 면모 때문에 호감보다는 존경을 받는 인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영국 총리였던 에드워드 히스는 그에 대해 "그는 그저 머리일 뿐이다"라고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강한 의무감을 가진 인물로도 묘사되었으며,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그를 마지막 프로이센인 중 한 명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냉전 시대 서독 외교 정책의 상징 중 하나인 할슈타인 독트린과 함께 기억된다. 이 독트린은 동독을 국가로 승인하는 제3국과는 외교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서독의 독점적 위임 주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정책이었다. 비록 이 정책의 구체적인 설계는 그의 부관이었던 빌헬름 그레베가 주도했지만, 당시 외무차관이었던 할슈타인의 이름이 붙여져 널리 알려졌다.

1997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발터 할슈타인 유럽 헌법 법학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할슈타인은 1982년 3월 29일 슈투트가르트에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후 슈투트가르트 발트프리트호프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6. 수상

1961년에는 유럽 연합 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아헨 시로부터 카롤루스 대제상을 수상했다.

할슈타인은 생애 동안 유럽과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기에는 할슈타인이 교편을 잡았던 조지타운 대학교 외에도 함부르크 대학교, 파도바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등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About the EU https://europa.eu/eu[...] 2016-06-16
[2] 서적 Das Personenlexikon zum Dritten Reich. Wer war was vor und nach 1945 Fischer Taschenbuch Verlag 2005
[3] 웹사이트 The Hidden Nazi Background Of Walter Hallstein, Founding President Of The Brussels EU Commission http://www4.dr-rath-[...] 201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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